체스로 알아보는 전략
오답을 소거하라. 정답 중에서는 직관으로 빠르게 선택하라.
회사를 운영하면서, 제품을 만들면서,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의사결정의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 모든 순간들에 아주 명확한 답 하나가 있진 않다. 올바른 답 여러 개가 존재한다. 핵심은 "틀린 답"은 존재하며, "올바른 답"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사결정의 순간들에는 보통 여유가 주어지지 않고 여유가 있더라도 시간을 올바르게 써야 한다. 틀린 답을 빠르게 거르는 데에 집중하고, 올바른 답들 사이에선 현 상황에서 수행을 잘할 수 있는 답을 골라야 한다. 올바른 답 2개를 놓고, 내가 뭘 해도 비슷비슷할 것 같은 답 사이에서 뭘 골라야 하지 몇 일이고 고민하는 건 어리석다. 보통 이런 경우가 황금 밸런스라 결정이 제일 어렵다. 체스에서 백 잡고 첫 수로 d4와 e4 사이에서 15분 고민하는 느낌이랄까? 뭘 해도 좋다. 실제로 승률 분석을 해보면 레이팅 구간 따라 다르고, 자기가 익숙한 정도에 따라 다르다. b3, g4, Na3 같은 확실한 오답을 논리적으로 걸러 이외 정답 후보를 정해두고 그 안에서는 직관적으로 빠르게 결정한다.
이후 전략을 함께 결정하라.
이 의사결정을 내리면서 우리는 전략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후 우리가 퀸사이드에서 싸우게 될지, 킹사이드에서 싸우게 될지 / 오픈게임이 될지, 세미오픈게임이 될지 / 어떤 기물들의 중요성이 올라가는지 등을 함께 고민하며 이후 전반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d4를 하고 e4 오프닝처럼 게임을 풀어가면 망하고, e4를 하고 d4 오프닝처럼 하면 망한다. 각 수에 맞게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 d4 한 후 e4 오프닝처럼 게임 풀어가서 지고 d4를 해서 졌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면 안 된다. 결정 당시 전략이 없었다면 그 당시에 어떤 결정을 했더라도 다 안 좋은 결정이 되었을 거다. 어찌 보면 칸트의 의무론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겉으로 봤을 때 똑같은 의사결정이더라도 이후 전략을 고민하고 결정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이게 올바른 의사결정이었다, 아니었다가 판가름 난다. 체스 엔진의 평가를 보면 내가 가끔 별 생각 없이 올바르게 둔 수들이 있다. 이후 수들에 대한 고민 없이 이렇게 수를 두면 이 당시에는 체스 엔진이 잘 뒀다고 평가해도 이후 그 고민 부족이 드러나게 되는 순간 어김없이 블런더를 해버린다. 사실 그 블런더를 한 시점에서도 더 잘할 수 있기야 했겠지만 전략 없이 결정해버린 그 이전의 내 탓이 더 클 수 있다.
나만의 오프닝을 만들어라.
체스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오프닝이 생긴다. 나만의 오프닝이 생기면 익숙한 상황을 만들면서 내가 원하는 전장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내가 익숙한 고객 / 내가 익숙한 문제 / 내가 익숙한 실행 방식 등 나만의 오프닝을 만들어보자. 하나의 오프닝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저번 게임에서 뒀던 나의 오프닝은 문제: 논문 이해 / 고객: 연구자 / 솔루션: AI (Only Software) 였다. 이번에 키로의 도전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오프닝이다. 문제: 오프라인 지식의 디지털화 / 고객: e북 변환하는 사람들 / 솔루션: AI + 하드웨어이다. AI가 이젠 기본이 된 걸 생각하면 사실상 겹치는 게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나에게 이런 새로운 오프닝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있다. 고객들을 어떻게 만나는지, 제품 로드맵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며 타임라인은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는지, 하드웨어는 처음이지만 AI와 함께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지, 돈을 어떻게 버는지 등에 대한 전반적인 이후 전략을 함께 알고 있기에 완전히 새로운 오프닝에서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도전했다.
불리하다면 판을 흔들어라.
불리할 땐 항상 최고의 수만을 두는 것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유리할 때도 항상 최고의 수만을 두는 것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 시간 제한이 있는 상황에서 유리할 땐 크게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리스크를 낮추는 것 또한 전략이며, 불리할 땐 최고의 수보단 판을 흔드는 수를 두어 상대의 실수를 유발하는 것 또한 전략이다. 거의 모든 게임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롤에서도 유리하면 굳이 바론 강타 싸움을 갈 이유가 없고, 불리하면 죽을 가능성이 크더라도 어떻게서든 바론 스틸을 시도해봐야 한다.
현 상황이 썩 녹록치 않다면, 이런 리스크 있는 플레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행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 리스크 있는 결정을 빛나게 하는 건 그걸 성공으로 만든 실행 역량이다.
무한게임과 유한게임의 차이를 이해해라.
마지막으로 무한게임과 유한게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게임은 끝이 정해져 있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게임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의사결정과 필요한 전략들은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누군가를 이기기보다 스스로의 삶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올바른 답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탐색 공간을 넓히고, 오답을 거르고, 나의 전반적인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에 맞춰 정답 중 수를 직관적으로 선택하자. 하나하나 둘 때마다 이후 플랜을 세우자. 전략을 세웠다면 그것을 실행으로 증명하자. 인생은 NP-hard라 아무도 global optima를 모르고 거기로 가는 길도 모른다. 내가 가는 길이 나만의 optima다.